
'산 채로 봉인된 흑사병의 거리'라고 알려진 메리 킹스 클로즈. 그런데 자료를 들춰보면, 그 골목은 흑사병 이후에도 100년 넘게 멀쩡히 사람이 살던 동네였어요.
에든버러 시청사(City Chambers) 아래, 17세기 골목 한 줄이 그대로 묻혀 있는 곳. 가이드 손전등 불빛 아래에서만 드러나는 그 돌벽에는, 사실 전설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붙어 있습니다. 오늘은 그 골목 이름의 주인부터, 뒤늦게 만들어진 유령까지 한 번 풀어드릴게요.
1635년 이전, 활기찬 상업 골목이었던 시절
지금은 지하 통로처럼 보이는 메리 킹스 클로즈, 17세기에는 에든버러 구시가의 평범한 한 골목이었습니다. 변호사, 상인, 재단사, 톱장이가 한 건물 위아래에 빽빽이 살던 7층짜리 석조 건물들이 양쪽으로 솟아 있었다고 해요. 좁은 골목 위로 빨래가 걸리고, 1층에서는 가게 셔터가 열리고, 위층에선 사무실이 굴러가던 자리였습니다.

이름의 주인 메리 킹(Mary King)은 흑사병 희생자가 아니에요. 에든버러 상인 알렉산더 킹(Alexander King)의 딸로 태어나, 1620년대~1640년대 무렵 이 골목에서 직물 장사를 굴린 여성 사업가로 전해집니다(1644년경 사망설이 유력하게 회자됩니다). 여성이 자기 이름으로 사업체를 가진 사례가 드물던 시기에, 그녀의 이름이 골목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점만 봐도 어떤 사람이었을지 짐작이 가시지요. 당시 한반도는 인조 재위기, 병자호란을 막 겪고 난 시점이었으니 시간 감각을 잡으시기엔 그쯤이 편할 거예요.
"흑사병 거리" 이미지로 출발하셨다면 좀 의외이실 텐데요. 저도 처음 자료를 열었을 때 "어, 무덤이 아니라 활기찬 시장 골목이었네" 하고 멈췄거든요.
"600명을 산 채로 벽돌로 봉인했다"는 전설의 정체
1644년 크리스마스 무렵 시작돼 1645년 절정에 이른 흑사병이 에든버러를 덮칩니다. 역사가들은 도시 인구의 약 3분의 1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만큼 큰 타격이었어요. 시 당국은 첫 페스트 닥터 존 폴리티우스(John Paulitious)가 1645년 봄 흑사병으로 숨지자, 6월에 조지 레이(George Rae)를 후임으로 고용합니다. 감염된 가구의 창문에는 흰 천을 걸어 표시한 뒤 식량과 물을 골목 입구까지 가져다주는 방식으로, 격리와 지원을 같이 운영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주 회자되는 전설이 있어요. "환자 600명이 있던 메리 킹스 클로즈를 통째로 벽돌로 막고, 산 채로 묻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괴담집·관광 가이드의 단골 레퍼토리지요.
그런데 시 의회 기록을 뒤져보면, 골목을 통째로 봉쇄·매장했다는 항목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감염 가구 단위로 격리하고, 회복되면 다시 거리로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더 많이 남아 있어요. 이 '봉인설'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괴담집들이 골목의 어두운 분위기에 맞춰 살을 붙이면서 부풀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검은 망토에 새 부리 가면을 쓴 조지 레이가 좁은 돌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면은 실제로 있었던 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가 환자들을 골목째로 밀봉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 셈입니다.
1753년, 시청사 공사가 골목을 통째로 덮어버린 날
봉인설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증거는 단순해요. 골목에서 흑사병 이후로도 100년 넘게 사람이 멀쩡히 살았다는 기록입니다. 18세기 초까지 메리 킹스 클로즈에는 가게가 굴러갔고, 임대 계약서·세금 장부에 거주자 이름이 줄지어 등장합니다.

골목이 실제로 햇빛을 잃은 건 1753년이에요. 에든버러 시 당국이 로열 익스체인지(Royal Exchange), 지금의 시청사 자리에 새 건물을 올리기로 결정합니다. 건축가 존 애덤(John Adam)이 맡은 이 공사는 기존 7층 건물들을 다 부수지 않고, 아래층 부분을 그대로 새 건물의 지하 토대로 삼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위쪽 층들을 잘라내고, 남은 아래쪽을 새 건물이 머리 위에 얹혀 누른 셈이지요. 한순간에 골목 한 줄이 통째로 천장을 가진 지하 공간으로 바뀐 거예요. 좁은 돌계단, 흙바닥, 벽난로 자국이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어둠 속에 그대로 갇혔습니다. 흑사병 때문에 묻힌 게 아니라, 도시의 재개발이 그 위를 그냥 덮어버린 결과였어요.
"공사 편의를 위해" 한 골목이 산 채로 박제됐다는 사실 쪽이, 저는 봉인 전설보다 오히려 더 묘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유령 '애니'와 방문객이 두고 간 인형들
그렇다면 그 유명한 유령 '애니(Annie)'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이게 의외로 최근 이야기입니다. 1992년, 일본인 영매 아이코 기보(Aiko Gibo)가 초자연 현상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촬영차 이 지하 골목을 방문해 "인형을 잃어버린 어린 소녀의 슬픔이 강하게 느껴진다"고 말한 데서 시작됐다고 전해져요. 기보는 직접 작은 인형 하나를 사 와서 방 한쪽에 놓아뒀는데, 그게 그 유명한 '타탄 바비(Tartan Barbie)'였다고 합니다.

이후 가이드 투어 코스에 '애니의 방'이 만들어졌어요. 좁고 어두운 방 한쪽 모퉁이에, 방문객들이 두고 간 봉제 인형과 작은 장난감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곰인형, 헝겊 인형, 작은 자동차까지 벽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요. 모인 인형은 정기적으로 자선단체에 기부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애니라는 이름도, 인형이라는 설정도 17세기 기록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1990년대 이후 30여 년 사이에 만들어진, 말 그대로 '현대의 유령'이지요. 그렇다고 이게 가짜라서 시시하다고 말하긴 어려워요. 한 영매의 한 마디로 시작된 이야기가 30년 만에 전 세계 방문객이 인형을 들고 찾아오는 의례가 됐다는 점 자체가, 도시 전설이 어떻게 태어나는지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봅니다.
사실과 이야기 사이, 그 골목이 진짜로 흥미로운 이유
자료를 정리하다 보면 메리 킹스 클로즈는 네 겹의 이야기가 겹쳐 있는 자리예요.
첫째, 골목 이름의 주인 메리 킹은 17세기 여성 사업가였습니다. 둘째, '흑사병 환자 600명 봉인설'은 19세기에 살이 붙은 도시 전설입니다. 셋째, 골목이 실제로 묻힌 것은 1753년 시청사 공사 때 위에 새 건물이 얹히면서였어요. 넷째, 유령 애니는 1992년 한 영매의 방문에서 시작된 1990년대생 전설입니다.
지금도 '리얼 메리 킹스 클로즈(The Real Mary King's Close)'라는 이름으로 2003년 개장한 이 관광지는 가이드 투어로만 들어갈 수 있어요. 에든버러 사우스 브리지 아래의 '볼트(Vaults)'와는 다른 장소이니, 일정 잡으실 때 헷갈리지 않으셔야 합니다.
가이드의 손전등이 좁은 돌벽을 비추면, 1645년 흑사병이 지나간 자리와 1753년 시청사가 머리 위를 덮은 자리, 그리고 1992년 이후 쌓인 인형 더미가 한 골목 안에 동시에 있다는 게 보입니다. 봉인이라는 한 단어로 묶기엔 너무 다층적인 자리지요.

전설이 사실보다 단단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메리 킹스 클로즈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전설이 왜 그렇게까지 끈질긴지를 거꾸로 보여주는 골목이에요. 다음에는 같은 에든버러 구시가의 사우스 브리지 볼트, 그 아래에서 19세기 빈민들이 살았다는 또 다른 지하 공간 이야기를 한 번 풀어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