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치 마당의 모든 맹인이 함께 눈을 뜨는 그 유명한 만인개안 장면, 사실 가장 오래된 심청전엔 없었어요. 우리가 아는 그 결말은 판소리 흥행을 위해 후대에 덧붙인 각색이었습니다.
심청전은 한 권이 아니라 80여 종 이본의 군집이에요
자료실에 심청전 이본들을 쌓아 놓고 보면, 같은 제목의 책인데 안쪽 페이지가 다 달라요. 한지에 또박또박 적힌 경판본부터 거친 종이의 1920년대 딱지본까지, 표지 색깔이 제각각이에요.

심청전은 한 작가가 한 번에 쓴 작품이 아니에요. 18세기 후반 판소리 사설에서 출발해 시간이 흐르면서 약 80여 종의 이본(異本, 같은 이야기인데 내용이 조금씩 다른 판본)이 갈라져 나온 텍스트 군집입니다. 큰 줄기를 단순화하면 한남본 → 송동본 → 완판본 순으로 가지가 자랐다고 봅니다.
근원 설화로 자주 꼽히는 건 1729년 간행된 『옥과현 성덕산 관음사 사적』에 실린 「원홍장 설화」예요. 흥미로운 건, 이 원형 설화에 이미 효행, 인신공희(人身供犧, 신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 황후 즉위, 부친 개안의 골격이 거의 다 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심청전의 핵심 서사 골격은 18세기 이전부터 호남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뜻이지요.
한남본의 담백한 결말, 우리가 잘 모르는 심청전의 원형
가장 오래된 계열로 보이는 한남서림본(경판 24장본 계열)부터 풀어드릴게요. 이 판본은 정말 군더더기가 없어요.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용궁에서 환생하고, 황후가 되어 부녀가 상봉하고, 심봉사가 눈을 뜨는 것으로 단정하게 끝나요.

뺑덕어미도 없고, 장승상부인도 없고, 안씨맹인도 없어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조연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심봉사 역시 우스꽝스러운 노인이 아니라, 유교 이념에 충실한 진중한 인물로 그려져요.
한지에 단정한 한자로 적힌 한남본 마지막 장을 들여다보면, "어, 이게 우리가 아는 심청전이 맞나?" 싶을 정도예요. 군더더기를 다 걷어낸 한 줄짜리 효행록에 가까운 모습이에요.
완판본 만인개안, 우리가 아는 그 결말의 진짜 정체
대중적으로 가장 익숙한 결말은 완판본 계열이에요. 전주에서 간행된 판본인데, 판소리 무대를 위해 부풀려진 흔적이 곳곳에 보여요.

가장 큰 차이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심봉사가 눈을 뜰 때, 잔치 마당에 모인 모든 맹인이 함께 눈을 떠요. 이걸 만인개안(萬人開眼, 모든 사람이 눈을 뜬다는 뜻)이라고 부릅니다. 수십 명이 동시에 두 눈을 비비는 그 장면, 한 사람의 효가 집단의 구원으로 확장되는 순간이에요. 판소리 무대에서 마지막 사설을 풀어내는 광대 입장에선, 객석을 한꺼번에 울릴 절정의 카드였을 거예요.
뺑덕어미라는 사기꾼이 등장해 심봉사 재산을 털어먹는 해학적 후일담도 이때 추가됐다고 합니다. 심봉사가 나중에 안씨 맹인과 재혼해 부귀영화를 누리는 장면까지 덧붙어 있어요. 한남본의 점잖은 심봉사와는 전혀 다른,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인물로 다시 그려진 셈이지요.
우리가 교과서에서 만난 '효녀 심청'의 전형은, 사실 가장 후대에 만들어진 이 완판본의 얼굴이었어요.
신재효본과 구활자본, 정제된 두 갈래의 변형
세 번째 갈래는 19세기 신재효의 개작본이에요. 신재효는 판소리 사설을 문학적으로 정리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완판본의 과한 해학과 늘어지는 후일담을 덜어내고 율문체(운율 있는 글)의 품격을 살리는 쪽으로 다듬었다고 전해져요. 책상 앞에 앉아 사설 한 줄 한 줄을 깎아 내리는 모습이 그려지지요. 완판본과 한남본 사이 어디쯤에 놓인 중간 형태로 보면 됩니다.

네 번째 갈래는 1910~30년대 구활자본, 흔히 딱지본이라고 부르는 인쇄본이에요. 거친 종이에 알록달록한 표지, 그 안에 완판본의 서사가 그대로 옮겨져 있어요. 다만 인쇄 매체 특성에 맞게 후일담을 압축하고 권선징악 메시지를 앞으로 끌어올렸다고 합니다. 이 시기엔 신소설의 영향을 받아 심청의 효를 개인 윤리에서 국가 윤리로 격상시키는 색채까지 더해졌다고 해요.
같은 이름의 책 네 권을 나란히 펼쳐 놓으면, 결말 페이지의 풍경이 전부 달라요. 누구는 점잖게, 누구는 시끌벅적하게, 누구는 절제된 운율로, 누구는 교훈을 굵게 강조하며 끝나지요.
효녀 서사 너머, 21세기에 다시 읽히는 심청 이야기
요즘 들어서는 심청전을 전혀 다른 각도로 다시 읽으려는 시도도 늘었어요. seri·비완 작가가 저스툰에 2017~2019년 연재한 『그녀의 심청』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데, 심청과 장 승상 부인 두 여성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워 '15세 소녀가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가는 이야기'를 효녀 서사가 아닌 인신매매 구조로 다시 들여다봅니다. 인당수로 향하는 배 위에서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어린 심청의 한 컷이, 어릴 적 외웠던 효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오더라고요.
이런 재해석이 가능했던 건, 역설적으로 심청전이 처음부터 단일한 텍스트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한남본의 담백한 효, 완판본의 집단 구원, 신재효본의 절제된 운율, 구활자본의 국가 윤리, 그리고 21세기의 비판적 재독해까지. 매 시대가 자기만의 결말 한 장을 덧붙여 온 이야기였어요.

학교에서 배운 마지막 장면이 잔치 마당의 만인개안이었다면, 그건 사실상 가장 늦게 자란 가지의 풍경입니다. 다음에는 같은 판소리계 소설인 춘향전의 이본 차이, 그러니까 이몽룡과 춘향의 신분이 판본마다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한 번 풀어볼 생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