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의문/고대 문명

산시성 푸핑 창춘 유적 — 서주 왕기의 사라진 퍼즐 조각

수상한작가 2026. 6. 23. 07:00

 

2022년 여름, 산시성 푸핑현 창춘촌의 밭 아래로 삽이 들어갔습니다. 12미터를 파 내려간 끝에 드러난 건 옥과 청동기로 가득한, 한 부부의 무덤이었어요.

 

2026년 4월 말, 중국 10대 신발견에 오른 한 줄

자료를 정리하다가 한 줄에서 손이 멈췄어요. 2026년 4월 29일, 국가문물국이 발표한 '2025년도 전국 10대 고고학 신발견' 명단에 서주 시대 유적이 한 곳 끼어 있더라고요.

 

푸핑 창춘 유적. 최근 5년간 서주에서 춘추로 이어지는 시기 중 단독으로 이름을 올린 첫 사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도 220만 제곱미터, FIFA 국제축구장 표준 기준으로 축구장 300개를 합친 면적으로요.

 

 

신화통신과 CCTV가 비중 있게 다룰 만큼 학계에선 큰 사건이었어요. 그런데 정작 일반 독자들에겐 이름조차 낯섭니다. 왜 그 자리가 그렇게 중요했는지, 한 번 풀어볼게요.

 

펑하오와 뤄이 사이, 잃어버린 동부 왕기

서주의 무대는 두 도시였습니다. 서쪽 펑하오(지금의 시안)와 동쪽 뤄이(지금의 뤄양). 왕이 거처하던 펑하오에서 동쪽 거점 뤄이까지, 그 사이가 바로 왕의 직할령인 왕기(王畿)였어요.

 

문제는 이 축선 한가운데가 고고학적으로 거의 비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두 수도를 잇는 동맥인데, 정작 그 사이를 받치던 대형 거점 유적이 나오지 않았어요. 학자들은 이 구간을 '잃어버린 동부 왕기'라 부르며 오랫동안 답답해했다고 합니다.

 

 

푸핑은 그 빈자리 한가운데 놓여 있어요. 2022년부터 산시성고고연구원이 여러 해에 걸쳐 220만 제곱미터를 훑었습니다. 서주 중후기 관중 동부의 대형 채읍 취락으로는 손꼽히는 규모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원 한복판, 발굴 가림막 너머로 격자처럼 그어진 트렌치가 끝없이 이어진 풍경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 아래 3,000년 전 무엇이 묻혀 있었는지, 한 줄씩 풀어보겠습니다.

 

12미터 아래의 부부, 백가묘지 M1·M2호

핵심은 대형 공공 묘지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묘도가 딸린 고등급 대묘가 압권이었어요. 현지 보도에 따르면, 묘지에서 가장 주목받은 부부 합장 대묘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깊이 12에서 14미터. 보통 4층 아파트 높이예요. 한 사람을 묻기 위해 그만큼을 파 내려갔다는 게 우선 놀라운 대목입니다. 무덤 안은 1곽 2관(一槨二棺) 구조였다고 해요. 큰 바깥 관 안에 안쪽 관 두 개가 나란히 놓인, 부부 합장의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그 안에서 청동기와 옥기를 합쳐 수백 점이 쏟아졌다고 전해집니다.

 

그중에서도 학계의 시선을 잡아끈 건 의례용 유물들이었습니다. 사람과 용이 새겨진 옥 장신구, 의례용 옥 무기인 옥과(玉戈), 그리고 줄지어 매단 돌 악기 석경(石磬) 같은 것들이지요.

 

 

석경이 한 세트로 출토됐다는 건, 이 무덤의 주인이 사적인 자리에서도 의례 음악을 누릴 수 있는 신분이었다는 뜻입니다. 묘지의 연대는 도기 조합과 측년 데이터로 볼 때 서주 중기에서 후기, 그러니까 기원전 9~8세기 무렵으로 알려졌어요. 한반도로 치면 청동기 시대에 해당합니다.

 

발굴팀은 이 일대 대묘의 주인들을 '경대부(卿大夫)급', 즉 왕실 바로 아래 고위 귀족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수로로 나뉜 격자 도시, 다궁격(多宮格)

흥미로운 점은 무덤만이 아니었어요. 220만 제곱미터를 훑고 나니, 유적이 셋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살던 거주 구역, 죽은 자가 묻힌 묘지 구역, 그리고 도자기·청동기·뼈 도구를 만들던 수공업 구역.

 

이 세 권역을 가르는 게 수로(水路)였다고 합니다. 격자무늬로 흙을 파 물길을 내고, 그 물길로 구역을 나눈 거예요. 이런 배치를 '다궁격(多宮格)' — 여러 칸으로 나뉜 격자 — 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 다궁격 배치는 펑하오나 뤄이 같은 수도급 유적에서 주로 확인되어 왔던 것으로 평가됩니다. 지방의 한 채읍(采邑), 그러니까 귀족의 식읍에서 이런 도시 계획이 그대로 작동했다는 사실은 처음 확인된 것으로 평가됩니다.

 

 

물길로 나뉜 거주 구역과 공방, 그 사이를 사람과 우마차가 오가는 풍경. 3,000년 전 서주의 지방 도시가 그렇게 정연한 그림이었다는 점에서 저도 한참 자료를 다시 들춰봤어요.

 

채읍이 메운 서주 정치지리의 빈 칸

서주에는 '기내무봉국(畿內無封國)'이라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왕의 직할령인 왕기 안에는 제후국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왕기 안 거점은 누가 다스렸을까요.

 

답은 채읍(采邑)이었습니다. 제후가 아닌 경대부에게 식읍으로 떼어준 직할령. 푸핑 창춘 유적은 이 '왕기 안 대형 채읍'을 실물로 확인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서주 정치지리의 빈 칸 하나가 채워진 것이지요. 펑하오와 뤄이를 잇는 동맥 한가운데, 경대부 가문이 자기 식읍을 격자 도시로 운영하고, 부부가 12미터 아래 옥과 함께 묻혔다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건 발굴팀에 따르면 정식 발굴된 면적이 전체의 1%에도 못 미친다는 점이에요. 청동기 거푸집이나 갑골문 같은 결정적 유물이 아직 대부분의 흙 아래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동시기 한반도 청동기 문화와 비교 연구가 본격화될 자리도 여기로 알려져 있어요.

 

 

3,000년이 흘러서야 학자들은 빈 칸의 위치를 알아냈고, 진짜 이야기는 이제 극히 일부만 풀린 채로 남아 있습니다. 나머지 흙 아래에 무엇이 더 잠들어 있을지, 그 답은 다음 시즌 삽 끝에 달려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