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미스터리/미해결 사건

나무 기둥에 'CROATOAN', 435년 풀리지 않은 실종 사건

수상한작가 2026. 5. 24. 07:00

 

1590년 8월, 3년 만에 로어노크 섬에 발을 디딘 존 화이트의 눈앞엔 텅 빈 집터와 기둥에 새겨진 단 한 단어가 남아 있었어요. 'CROATOAN'.

 

손녀 버지니아 데어를 보러 온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손녀도, 딸도, 함께 두고 떠난 115명 안팎의 정착민도 흔적이 없었어요. 시신도, 무덤도, 싸운 자국도 없었습니다. 자료를 정리하다가 이 한 줄에서 또 손이 멈췄어요 — 어떻게 한 마을이 통째로 조용히 사라질 수 있을까요.

 

1587년, 잘못 내려진 섬에서 시작된 두 번째 정착

이야기는 그보다 2년 앞선 1585년으로 거슬러 갑니다. 영국은 신대륙에 첫 식민지를 세우려 했지만 1차 시도는 1년 만에 무너졌어요. 식량은 떨어지고 원주민과의 관계는 틀어졌고, 정착민들은 도망치듯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587년의 두 번째 도전은 분위기가 달랐어요. 군인 위주였던 1차와 달리, 이번엔 여성과 아이까지 포함한 약 115명(기록에 따라 남성 90명·여성 17명·어린이 11명)의 '가족 단위' 이주민이 배에 올랐습니다. 총독은 화가 출신의 존 화이트, 그의 딸 엘리노어와 사위도 함께였어요.

 

원래 목적지는 지금의 워싱턴 DC 근처 체서피크 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장이 더 이상 못 가겠다고 버텼다고 해요. 그렇게 일행은 1차 식민지가 망한 바로 그 자리, 로어노크 섬에 강제로 내려졌습니다. 그해 8월 18일, 엘리노어가 딸을 낳았어요.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최초의 영국계 아기, 버지니아 데어입니다.

 

 

보급선이 3년 만에 돌아왔을 때의 텅 빈 해변

식량이 빠르게 바닥났습니다. 존 화이트는 직접 영국으로 가서 보급을 받아오기로 했어요. 손녀가 태어난 지 9일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가 영국에 도착한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 해안으로 밀려옵니다. 영국 정부는 모든 배를 전쟁에 묶어놓았고, 화이트는 발이 묶였어요. 작은 보급선 두 척을 어렵게 띄웠지만 해적에게 약탈당해 되돌아왔습니다.

 

다시 배를 구하기까지 꼬박 3년. 1590년 8월, 화이트가 마침내 손녀의 세 번째 생일에 맞춰 섬으로 돌아왔을 때, 바닷가에 도착한 그가 본 것은 모닥불 연기도, 종소리도, 마중 나오는 사람도 없는 적막한 해변이었어요. 트럼펫을 불고 영국 노래를 크게 불러봤지만 누구도 화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CROATOAN 옆에 십자가가 없었던 이유

정착지는 무너져 있었지만 묘하게 정돈된 모습이었어요. 집들은 해체되어 옮겨진 흔적이 있었고, 무거운 짐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신은 한 구도 없었고, 화살촉이나 핏자국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화이트는 떠나기 전 정착민들과 약속을 해두었거든요.

"만약 위험에 처해 떠나야 한다면, 글자 옆에 십자가(✚)를 함께 새겨라"

 

그런데 기둥에 새겨진 단어 옆에는 십자가가 없었습니다.

 

입구 기둥엔 'CROATOAN', 근처 나무껍질엔 'CRO'. 'Croatoan'은 남쪽으로 80km쯤 떨어진 해터러스 섬에 살던, 비교적 우호적이었다고 알려진 원주민 부족의 이름이었어요. 즉 이 글자는 조난 신호가 아니라, "우리는 크로아토안족에게 갔다"는 행선지 메모였던 셈입니다. 화이트는 당장 추적하려 했지만 그날 밤 거대한 폭풍이 닥쳐 닻줄이 끊어졌고, 배는 결국 영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이트는 다시는 신대륙에 발을 들이지 못했어요.

 

 

435년간 쌓인 가설과 모래 밑의 유물들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은 '원주민 동화설'입니다. 해터러스 섬에서 진행된 발굴(브리스톨 대학의 마크 호튼 박사 팀과 Croatoan Archaeological Society 공동 프로젝트)에서 16세기 영국제 총기 부품과 칼자루, 철을 두드릴 때 떨어지는 비늘(해머스케일)이 원주민 유물층과 뒤섞여 나왔거든요. 정착민들이 부족에 흡수되어 함께 살았다고 보는 근거입니다.

 

내륙 쪽도 의심받고 있어요. First Colony Foundation이 발굴한 'Site X'(노스캐롤라이나 내륙, 앨버말 만 안쪽 버티 카운티)에선 16세기 영국 도자기 파편이 나왔습니다. 해터러스 섬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 로어노크에서 북서쪽으로 약 80km 떨어진 지점이에요. 더 흥미로운 건 2012년 영국 박물관이 화이트가 그린 1585년 지도를 빛에 비춰봤을 때예요. 종이 위에 덧댄 부분 아래에서 숨겨진 요새 표식이 드러났는데, 그 위치가 바로 이 버티 카운티 일대였습니다. 일부 정착민이 내륙으로 분산 이주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단서로 읽혔어요.

 

학살설도 있습니다. 1607년 제임스타운 식민지 기록에 파우하탄 추장이 "인근 부족과 함께 살던 영국인들을 학살했다"고 말한 대목이 있거든요. 다만 이건 전체가 아니라 일부 그룹의 운명일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에 환경 변수까지 겹쳤어요. 1998년 Science지에 실린 윌리엄앤메리·아칸소 대학의 나무 나이테 분석에 따르면 1587~1589년은 그 지역에서 800년 만의 최악 가뭄이 닥친 시기였다고 합니다. 식량이 동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어요. 굶주린 115명 안팎의 사람들이 한 곳에 머무를 수 없어 작은 무리로 갈라졌다고 봐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사라진 식민지' 신화가 19세기에 만들어진 과정

이 사건이 'Lost Colony(사라진 식민지)'라는 극적인 이름으로 굳어진 건 사건 발생 300년 가까이 지난 19세기 후반이었어요. 1937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같은 이름의 야외극이 매년 여름밤 무대에 오르면서 미스터리 서사가 대중에게 단단히 박혔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극은 같은 해변 근처 야외극장에서 공연되고 있어요.

 

문제는 그 신화화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시선이 가려졌다는 점입니다. 모든 이야기가 '사라진 백인'에 집중되는 동안, 같은 시기 천연두와 폭력으로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던 카로라이나 알공킨족의 비극은 거의 조명받지 못했어요. 사실 First Colony Foundation을 비롯해 마크 호튼 박사 팀 등 현지에서 발굴을 이어온 연구자들은 이 사건이 풀린 미스터리에 가깝다고 봅니다. 정착민들은 죽지 않았고, 작은 무리로 흩어져 원주민 사회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거지요.

 

밤바다를 향해 손녀의 이름을 부르는 한 노인의 모습, 폭풍에 끊어지는 닻줄, 그리고 끝내 비어 있던 해변. 그날 화이트가 본 풍경은 그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을 거예요. 1593년 그가 친구 리처드 해클루트에게 쓴 마지막 편지(훗날 해클루트의 Principal Navigations, 1600에 수록됨)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안전을 신께 맡기는 수밖에"

 

기둥에 새겨진 여덟 글자는 위험 신호로 새기지 않았다고 화이트는 기록했어요. 그저 "우리는 여기로 갔다"는 메모였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 행선지에 도착한 사람은 끝내 아무도 없었고, 43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115명 안팎의 마지막 발자국은 노스캐롤라이나 어느 모래밭 아래에 묻힌 채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