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이 불완전한 건 죄를 지어서가 아니었어요. 너무 완벽해서, 신들이 두려워 그 눈에 김을 서리게 한 결과였다고 적혀 있어요.
자료를 정리하다가 16세기 과테말라 고원에서 적힌 한 권의 필사본 이야기를 다시 꺼냈는데요. 진흙으로 빚었다가 비에 녹고, 나무로 깎았다가 가축들에게 쫓겨난 끝에, 결국 옥수수 반죽으로 사람을 빚어냈다는 창세 신화입니다. 키체 마야족이 남긴 『포폴 부(Popol Vuh)』 이야기를 풀어드릴게요.
라틴 문자로 살아남은 키체 마야의 창세서
포폴 부는 과테말라 고원의 키체(K'iche') 마야족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던 신화·역사 모음집입니다. 16세기 중반, 키체 귀족들이 식민지 시대에 들어온 라틴 알파벳을 빌려 자신들의 옛이야기를 옮겨 적었어요.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마야 상형문자 두루마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1701~1703년 사이 도미니코회 수사 프란시스코 히메네스(Francisco Ximénez)가 과테말라 산골 교구에서 키체어 원본을 우연히 발견하고, 키체어와 스페인어를 양옆으로 나란히 놓은 대역본으로 베껴 둔 필사본 한 권 — 그게 오늘날 남은 유일한 사본입니다.
원본은 그 뒤로 사라졌어요. 수사의 손에서 두 번 베껴진 그 종이 한 권이 아니었다면, 키체 마야가 사람을 어떻게 보았는지 우리는 짐작조차 못 했을 거예요. 저는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두 번의 망각을 가까스로 피한 책"이라는 말이 자꾸 떠오르더라고요.
신을 부르지 못한 동물과 비에 녹아버린 진흙 인간
창조의 주체는 세 신의 의회였습니다. 주권자 테페우(Tepeu), 깃털 달린 뱀 쿠쿠마츠(Q'uq'umatz), 그리고 하늘의 심장 우라칸(Huracán). 영어 단어 '허리케인(hurricane)'은 타이노어를 거쳐 스페인어로 들어온 말인데, 마야의 우라칸과 같은 어원 계열로 묶이곤 해요.
신들이 사람을 만들고 싶었던 이유는 의외로 소박합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기억해 부르고 찬양해줄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외로움이라기보단, 신이라는 존재가 누가 알아봐 줘야 비로소 신으로 성립한다는 생각에 가까웠던 모양입니다.

첫 번째 시도는 동물이었어요. 숲을 채우고 산을 채워봤지만, 짖고 울 뿐 신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동물들은 "찬양할 줄 모르는 자, 잡아먹히는 자리에 머무르라"는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진흙. 손으로 형체를 빚었지만 비가 한 번 스치자 가슴이 흘러내리고 목이 무너졌어요. 말이라는 게 어찌나 어눌하던지, 본인이 무슨 소리를 내는지조차 몰랐다고 전해집니다. 신들은 그 진흙 형상을 부숴 흙으로 돌려보냈어요.
송진 비와 가축의 반란, 그리고 원숭이가 된 나무 인간
세 번째 재료는 나무였어요. 남자는 산호목, 여자는 갈대로 깎아 만들었더니 이번엔 제법 그럴듯했습니다. 자식을 낳고 마을을 이루며 번성했어요.
문제는 속이 비었다는 거였습니다. 심장이 없고 영혼이 없으니, 신들을 기억하지 못했어요. 자신을 빚은 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피조물 — 신들의 분노가 여기서 폭발합니다.
먼저 끈적한 검은 비가 쏟아졌어요. 송진의 대홍수라고 적혀 있는데, 하늘에서 시커먼 수액이 흘러내렸다고 상상하시면 됩니다. 동시에 평소 부엌에서 쓰던 맷돌이 굴러와 그들을 으깨고, 항아리가 깨져 날아들고, 집에서 기르던 개들이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었습니다. "너희가 우리를 함부로 다뤘으니 이제 우리가 너희를 다룬다" — 사물과 가축의 반란이지요.

대홍수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소수는 숲으로 도망쳤고, 그 후손이 오늘날의 원숭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마야 사람들이 숲에서 원숭이를 만났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상해 보면, 친근함과 서글픔이 같이 깃들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 신화를 알고 다시 읽으면 그 시선이 좀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여기서 잠깐 막간이 있습니다. 옥수수 인간이 등장하기 전에 영웅 쌍둥이 후나푸와 시발란케 형제가 지하세계 시발바(Xibalba)로 내려가 죽음의 군주들을 격파하고, 스스로 해와 달이 되어 하늘에 걸립니다. 우주의 질서가 잡힌 다음에야 비로소 사람을 빚을 무대가 마련된 셈이에요.
노란 옥수수와 흰 옥수수로 빚어낸 첫 네 사람
네 번째 재료는 옥수수였습니다. 노란 옥수수와 흰 옥수수를 갈아 반죽한 것이 사람의 살이 되고, 옥수수 물이 피가 됐다고 적혀 있어요.
이게 단순한 재료 선택이 아닙니다. 키체 마야는 옥수수 농경으로 문명을 일군 사람들이었어요. "우리가 옥수수를 키운 게 아니라, 옥수수가 우리를 키웠다" — 그 자각이 신화에 박힌 자리입니다. 사람이 옥수수로 빚어졌다는 한 문장에 마야 문명의 생태학적 자기 정의가 들어 있어요.

최초의 인간은 발람 키체(Balam-Quitzé)를 비롯한 네 명의 남자였고, 이들이 키체 네 가문의 시조가 됩니다. 흥미로운 건 이들이 처음부터 너무 잘 만들어졌다는 점이에요. 옥수수 인간은 눈을 떴는데, 그 시야가 신과 같았습니다. 산 너머를 보고 바다 끝을 보고, 땅속에 묻힌 것까지 꿰뚫었어요. 지혜는 또 어찌나 깊은지, 신들이 알려주려던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들이 잠시 의논에 들어갑니다. "이대로 두면 이들이 우리와 같아진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바로 "거울에 입김을 불어 김을 서리게 하듯" 그들의 눈을 흐리게 한 것이었어요. 이 장면은 저도 처음 읽었을 때 한참을 멈춰 있었거든요. 인간이 불완전한 이유가 죄도 타락도 아닌, 신의 두려움이라는 발상이 너무 낯설었습니다.
시행착오로 적힌 창세기, 그 빈자리에 남은 것
포폴 부가 다른 창세 신화와 가장 다른 자리가 여기예요. 한 번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완성되는 창조가 아니라, 세 번 실패하고 네 번째에 겨우 닿은 시행착오의 기록입니다.
신들도 처음에는 답을 몰랐던 거예요. 동물에게 말을 시켰다가, 진흙을 빚었다가, 나무를 깎았다가, 결국 옥수수 반죽 앞에 도착한 신들. 그리고 그 옥수수 인간조차 너무 완벽해서 한 번 더 손을 봐야 했던 신들. 어쩌면 이 신화의 진짜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몰라 거듭 다시 손을 댄 신들 쪽일지도 모르겠어요.
1701년 산골 교구의 책상 앞, 히메네스 수사가 키체어와 스페인어를 두 줄로 나란히 베껴 적던 그 밤을 떠올려봅니다. 그 펜이 멈췄다면 진흙 인간도 송진 대홍수도 옥수수 반죽도 다 사라졌을 텐데요. 한 권의 필사본이 한 민족의 우주관 전체를 붙들어 둔 셈입니다.
다음엔 이 안에서 잠깐만 비친 영웅 쌍둥이 후나푸와 시발란케가 지하세계 시발바에서 벌인 공놀이 시합 이야기를 좀 더 깊이 파볼 생각이에요. 죽음의 군주들과 머리 잘린 신과 마야 구기 경기장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또 한 편의 묘한 이야기가 거기 남아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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