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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에서 빚어진 사람들, 키체 마야 『포폴 부』 천지창조 따라 읽기

수상한작가 2026. 6. 15. 07:00

 

사람을 빚는 데 신들이 세 번이나 실패했다고 합니다. 진흙은 녹았고, 나무는 영혼이 없어 대홍수에 휩쓸렸고, 살아남은 나무 인간은 오늘날의 원숭이가 되었다는 이야기예요.

 

자료를 정리하다가 이 한 줄에서 손이 멈췄어요. 우리가 아는 창조 신화들은 대개 신이 한 번에 인간을 빚어내는데, 이 책은 신들이 머리를 싸매고 시행착오를 거듭합니다. 그 책의 이름이 바로 『포폴 부(Popol Vuh)』, 과테말라 고원에 살던 키체(K'iche') 마야의 천지창조 이야기입니다.

 

정복자의 알파벳으로 몰래 옮겨진 책

이야기는 16세기 중반 과테말라 고원에서 시작됩니다. 스페인 정복(1524년)이 끝난 지 30년쯤 흘렀을 무렵, 키체 마야 귀족 몇 사람이 한 가지 결심을 했다고 해요. 사라져가는 자기 부족의 창조 이야기를, 정복자가 들고 온 라틴 알파벳에다 키체어 발음 그대로 옮겨 적기로 한 거예요.

 

『포폴 부』라는 말은 키체어로 "의회의 책", 혹은 "사람들의 책"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16세기 중반(1550년대 무렵)에 쓰인 그 원본은 그 뒤로 사라졌어요. 단 한 부의 사본만 살아남았는데요, 그것도 1701년경 도미니크회 수사 프란시스코 히메네스가 치치카스테낭고 교구의 한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해 옮겨 적은 덕분이었지요.

 

 

지금 그 필사본은 시카고의 뉴베리 도서관 한 칸(Ayer MS 1515)에 잠들어 있습니다. 이단을 분쇄하러 들어간 가톨릭 수사의 손길이, 결과적으로 마야 영성의 결정판을 보존한 셈이지요. 역사가 비틀어 놓은 묘한 매듭이에요.

 

진흙 사람, 비에 풀어져 사라지다

자, 그러면 책을 펼쳐 첫 장면으로 들어가 볼까요. 태초에는 바다와 하늘, 그리고 그 위를 떠도는 두 신 테페우와 구쿠마츠만 있었다고 합니다. 두 신은 자기들을 부르고 기억해줄 존재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진흙을 빚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영 신통치 않았다고 해요. 머리는 굳지 않고, 얼굴은 한쪽으로 일그러지고, 말은 입에서 흘러나오질 않았다는 거예요. 흐물거리는 형체가 모래사장의 모래성처럼 비 한 번에 풀어져 내렸다고 합니다. 신들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자기들이 만든 작품을 직접 부쉈어요.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요, 이 신들이 전혀 전능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기술자에 가까워요. "말 못 하는 자는 우리를 부르지 못한다" — 그게 신들이 인간에게 요구한 단 하나의 기준이었습니다. 노동도, 제물도 아니고 "우리 이름을 부를 입"이었지요.

 

나무 사람이 원숭이로 강등된 사연

두 번째 시도는 나무였습니다. 이번엔 꽤 그럴듯했어요. 말도 하고, 자식도 낳고, 마을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한 가지가 빠졌어요.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기를 만든 신을 기억하지 않았고, 감사할 줄도 몰랐다고 해요.

 

그래서 신들이 두 번째 작품도 폐기하기로 합니다. 이번 방식이 좀 무서워요. 하늘에서 끈끈한 송진 비를 내리쏟더니, 네 마리 괴물을 풀어놓았다고 합니다. 눈을 파내는 셰코트코바치, 목을 자르는 박쥐 카말로츠, 살을 으깨는 재규어 코츠발람, 뼈를 부수는 투쿰발람. 이름만 들어도 짐작이 가시지요.

 

여기서 한 장면이 또 압권이에요. 나무 인간들이 부려먹던 맷돌과 항아리, 개와 칠면조까지 들고 일어나 옛 주인을 두들겨 패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가 우리를 함부로 굴렸으니 이제 우리가 너희를 갈아주마

 

그렇게 도구가 주인을 공격하는 풍경이지요.

 

 

도망쳐 숲으로 숨어든 일부 나무 인간의 후손이 오늘날의 원숭이라고 합니다. 다윈보다 300년 앞서 인간과 원숭이를 같은 가지에 놓은 셈인데, 방향이 정반대예요. 진화가 아니라 강등에 가깝습니다.

 

키체 신화의 옥수수 사람, 네 명의 시조

세 번째 시도, 그러니까 진짜 사람을 만든 재료가 옥수수였습니다. 신들은 흰 옥수수와 노란 옥수수를 가져다 갈아 반죽을 만들었어요. 그 반죽으로 살을 빚고, 팔다리를 붙였다고 합니다.

 

옥수수라는 재료를 가볍게 보면 안 돼요. 옥수수는 약 9,000년 전 멕시코에서 야생 풀 테오신테로부터 길러낸 작물이고, 메소아메리카 사람들의 칼로리 60~80%대를 책임지던 주식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고고학·영양학 연구마다 추정치가 갈리는 대목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이 옥수수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비유라기보다는, 매일 먹는 토르티야 한 장이 곧 자기 살이라는 신학적 선언에 가깝다고 보입니다.

 

이렇게 빚어진 최초의 네 사람이 키체 왕조의 시조가 됩니다. 발람키체(웃는 재규어), 발람아카브(밤의 재규어), 마우쿠타(빼어난 이름), 이키발람(달의 재규어)으로 풀이된다고 합니다(학자마다 해석이 갈리는 대목이라, "Jaguar Quitze"처럼 음역만 살리는 번역도 흔하다고 해요). 이름만 들어도 한 부족의 족보 첫 줄이 보이는 듯해요.

 

 

그런데 묘한 반전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옥수수 사람들이 너무 완벽했다는 거예요. 시력이 우주 끝까지 닿았고, 지혜는 신들과 같은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신들이 당황해서 "우리와 똑같아지면 안 된다"며 입김을 불어 그 눈을 거울처럼 흐려놓았다고 해요. 창세기의 선악과, 바벨탑 이야기와 어딘가 묘하게 겹치는 장면이지요.

 

토르티야 한 장에 새겨진 신화의 무게

오늘날 과테말라와 멕시코 남부의 마야계 사람들은 자신들을 "Hombres de Maíz", 옥수수의 사람들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시장 골목 어귀에 "Sin maíz no hay país(옥수수 없이 나라 없다)"라는 문구가 벽화로 그려진 모습을 기억나는 어느 농민운동 다큐에서 본 적이 있어요(다큐 제목·제작사·연도는 정확히 짚지 못해 검증 불가입니다). GMO 옥수수와 다국적 종자 특허에 맞서는 농민운동 슬로건입니다.

 

신화 한 줄이 식량 주권의 표어로 그대로 살아남은 풍경입니다. 수천 년 전 누군가가 옥수수 반죽을 빚으며 떠올렸을 이미지가, 21세기 시위 현수막의 글씨로 다시 적히고 있다는 게 자료 정리하다 가장 인상에 남았어요.

 

물론 이 책을 "마야 전체의 경전"이라 부르기엔 좀 무리가 있습니다. 마야는 30개 넘는 언어 집단으로 갈라져 있고, 『포폴 부』는 그중 키체 한 갈래의 책입니다. 그래도 신들이 세 번 실패한 끝에 옥수수에 닿았다는 그 시행착오의 흔적은, 한 부족의 책 너머로 멀리까지 번져왔다고 보입니다.

 

 

진흙은 말이 없었고, 나무는 마음이 없었지요. 옥수수가 되어서야 사람은 신을 부를 입과 신을 기억할 마음을 동시에 얻었습니다. 사실 이 책의 진짜 절정은 천지창조가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쌍둥이 영웅 후나푸와 슈발란케가 지하세계 시발바로 내려가 죽음의 신들과 공놀이로 맞붙는 대목인데요, 그 이야기는 다음 자료 정리에서 따로 풀어볼 생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