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신화/아메리카·아프리카·오세아니아

재 한 줌이 은하수가 되었다 — 남아프리카 /Xam족 소녀의 별 이야기

수상한작가 2026. 5. 23. 07:00

 

은하수를 만든 건 신도, 영웅도 아니었어요. 어머니가 구운 뿌리를 적게 줬다고 화가 난, 이름조차 남지 않은 어린 소녀의 손이었다고 합니다.

 

칼라하리 사막 어느 모닥불 옆, 한 아이가 잿더미를 한 움큼 쥐고 깜깜한 하늘로 흩뿌리는 장면 — 오늘 풀어드릴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합니다.

 

코이산 /Xam족, 칼라하리 사막에서 밤하늘을 읽던 사람들

이 신화의 주인공은 코이산족(남아프리카·보츠와나 일대에서 수렵채집으로 살아온 인류의 가장 오래된 분기 집단 중 하나)이에요. 정확히는 그 안에서도 19세기 말에 사실상 소멸한 '/Xam족(/잠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가급적 "/Xam 신화"라고 좁혀 부를게요.

 

이들에게 밤하늘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어요. 가로등 하나 없는 사막에서 은하수는 그대로 길잡이였지요. 사냥에서 늦게 돌아오는 사람이 별띠를 보고 야영지를 찾았다고 합니다.

 

칼라하리의 밤은 한국의 도시 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어두워요. 머리 위로 은하수가 강처럼 흘러내리고, 모래 위에 사람 그림자가 별빛만으로 비치는 풍경이지요. /Xam족 사람들에게는 그 별띠 하나하나가 누군가 손으로 흩뿌린 흔적이었습니다.

 

 

재 한 줌이 별띠가 된 그날 밤, /Xam 신화의 줄거리

이야기는 '첫 사람들(First People)'이라 부르던 아주 옛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 어머니가 모닥불에 !huin(후인) 뿌리라는 식용 구근을 구워 딸에게 나눠줬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준 양이 어린 소녀가 기대한 것보다 적었다고 합니다.

 

화가 난 소녀가 모닥불 옆 재를 한 움큼 쥐어 하늘로 던졌어요. 손에 들고 있던 뿌리 조각도 같이 던졌고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됐을까요? 흩날린 재는 하늘에 가서 길게 늘어진 띠가 되었습니다. 그게 은하수예요. 같이 던진 붉고 늙은 뿌리는 붉은 별이 되고, 희고 어린 뿌리는 흰 별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흥미로운 건 한 채록본 안에 동기가 두 가지로 같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에요. 하나는 방금 말한 '화가 나서' 버전, 다른 하나는 '어두운 밤에 사람들이 길을 찾도록 빛을 만들어주려고' 던졌다는 이타적인 버전이에요. 같은 행위가 두 얼굴로 전해지는 셈입니다. (Lucy Lloyd /Xam 노트북 285번)

 

 

1870년대 케이프타운 감옥에서 받아 적힌, 컬렉션 전체 약 1만 5천 쪽

이 이야기가 어떻게 종이 위에 남았는지가 또 묘해요. 1870년대 케이프타운, 독일 언어학자 빌헬름 블릭(1827–1875)과 그의 처제 루시 로이드 두 사람이 /Xam족과 !Kung족의 구술을 받아 적었다고 합니다. 노트북만 1만 쪽이 넘고, 컬렉션 전체로 따지면 약 1만 5천 쪽 분량이에요.

 

핵심 구술자는 ǁKabbo(까보)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는 이 별 이야기를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들었다고 말했고요. 어머니 → 까보 → 블릭 부부의 노트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구전의 사슬이 한 페이지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마음이 좀 무거워지는 부분이 있어요. 구술자 대부분이 식민 정부의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이었다고 합니다. 까보 본인도 케이프타운의 Breakwater 감옥(항만 부역장) 죄수였고요. 두꺼운 노트와 펜을 든 유럽 학자, 그 맞은편 의자에 앉은 늙은 /Xam 사람 — 그 풍경 속에서 별을 만든 소녀의 이야기가 받아 적혔다는 거지요. 이 자료는 지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라가 있어요.

 

 

헤라의 젖, 견우와 직녀, 그리고 /Xam의 부엌 재

세계 곳곳에 은하수 기원 이야기가 있는데, 재료를 비교해보면 /Xam 신화가 얼마나 독특한지 단번에 보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여신 헤라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젖이 하늘에 뿌려진 게 은하수예요. 영어 'Milky Way'와 'Galaxy(갈락시)'의 어원이 바로 그리스어 '갈락시아스(γαλαξίας, 젖의 길)'에서 왔거든요. 동아시아에서는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은빛 강, '은하(銀河)'로 묘사되고요.

 

신의 젖, 은빛 강, 신성한 액체 — 어느 쪽이든 우주적이고 거창합니다. 그런데 /Xam족 이야기에서는 그 자리에 부엌의 재가 들어가요. 누군가 저녁을 짓다 남긴 잿더미가 우주가 된 거지요.

 

창조의 주체도 다릅니다. 그리스에서는 여신, 동아시아에서는 옥황상제급 존재. /Xam 신화에서는 이름도 남지 않은 어린 소녀예요. 신의 권능이 아니라, 한 아이의 짜증과 손짓이 별띠를 만들었다는 발상이 다른 어디서도 잘 안 보이는 그림입니다.

 

 

스타트렉이 골라 간 절반, /Xam 원전에 남은 두 얼굴

이 신화는 최근 들어 의외의 통로로 대중에 알려졌어요. 2019년 12월 12일 공개된 〈스타트렉: 쇼트 트렉〉의 'The Girl Who Made the Stars' 에피소드에 인용되면서 영어권에서 한 차례 회자된 적이 있거든요. 다만 영상 버전은 '어두운 밤을 위해 빛을 만든 소녀'라는 이타적 미담 쪽으로만 다듬어진 모습이에요.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게 좀 아쉽다는 비판도 있다고 합니다(Michael Wessels, Folklore, 2007). 원전의 묘미는 분노와 이타심이 한 그릇에 담겨 있다는 모순에 있는데, 거기서 '착한 쪽'만 골라 떼어내면 이야기의 무게가 가벼워진다는 거지요. /Xam족은 굳이 둘 중 하나를 고르지 않았어요. 두 동기가 같은 채록본 안에 나란히 적혀 있습니다.

 

밤 사막의 모닥불 앞, 한 아이가 잿더미를 하늘로 흩뿌리는 장면 — 그 손이 화가 났는지 누군가를 도우려 했는지는 한 채록본 안에 두 답이 같이 적힌 채로 남아 있어요. 신이 우주를 빚었다는 신화는 흔하지만, 한 어린 소녀의 예측 불가능한 손짓 하나로 별띠가 그어졌다고 말하는 신화는 흔치 않습니다. 약 1만 5천 쪽 — 1870년대 케이프타운 감방 안에서 받아 적힌 그 분량이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Xam족의 거의 전부예요.

 

#코이산신화 #Xam족 #은하수기원 #BleekLloyd아카이브 #남아프리카신화